페스카마호 살인사건
<단편>
페스카마15호 求難日記
글 채 환 석
1996년8월26일
무더위로 인한 짧은 오전 일과를 끝내고 막 에어컨 바람을 즐기고 있는데 “함장입니다” 하는 굵은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들려왔다
“지금부터 전 직원은 장기간 항해에 대비한 출동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앞으로 2시간 후 긴급 출항할 수 있도록 할 것,
갑작스런 함 내 방송으로 백여 명에 달하는 승조원은 “날씨도 좋은 데 무슨 일인가”하며 우왕좌왕하면서
“기껏해야 조난선이 생긴 모양이지 별일 있을려고” 하는 최경사의 말에 모두들 겉으론 태연한척 하면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부서별로 긴급출항준비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애연가들은 담배가계로 또 일부는 식료품 구입으로 함장이 지시한 2시간의 시간은
그렇게 짧았다
오후 2시10분 “출항 30분전 각부서 출항준비”
오후 2시25분 “출항 15분전 총원 배치 붙어” 연이은 함교의 명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승조원들
그리고 오후 2시40분 긴 장성(長聲)을 울리며 “2홋줄을 제외한 전 홋줄 걷어” 하는 방송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구난함인 태평양함은 부산 다대포항을 그렇게 거대한 몸짓으로 출항하였다
방파제를 막 벗어난 시간 드디어 궁금증을 풀어주는 “본 함은 지금부터 태평양으로 조난선박을 구조하러간다”는 함 내 방송을 들으며 그동안 잊어왔던 과거의 외항선 항해사시절이 생각났다,
참으로 먼 바다 길고긴 항해.. 아마도 지구를 수백 번은 돌았으리라
내가 태평양 함에 발령받은 것은 지난 2월 육상부서에서 5년을 근무하고 난 뒤의 일이지만 보다 자유스런 부서에 비해 조금은 갑갑한 함 내 생활이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던 참 이었다
저녁식사 후 자리에 누었지만 쉬이 잠은 오지 않고 뒤척이다 야간항해당직근무에 임하여 오징어 배들의 집어등만 무심히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일본의 무쓰레정박지에 도착 도선사(PILOT) 대기에 들어갔지만 아무도 외국 항을 입항할 때 갖추어야 할 준비사항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건국 이래 단 한번도 태극기를 달고 일본열도를 통과 태평양까지 원양항해를 해본 적이 없는데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10여명의 당직근무자중에 외항항해 경력자는 나와 Y순경뿐이었다,
함장에게 외국 항 입항 시 준비사항을 말해주고 직접 도선사승강용 사다리(Pilot ladder)를 설치하고 통역으로 강제도선구역인 시모노새끼해협을 무사히 통과하자 긴박하게 해협통과를 강행한 함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02시경 시모노새키해협을 막 벗어난 지점에서 도선사가 하선하자 함장은 조함(操艦)을 부탁하며 자리를 떴다,
국내 어느 항만보다도 선박통항이 많은 일본의 세도내해를 거쳐서 붕구수도까지 참으로 긴 시간 동안의 조함으로 녹초가 된 것은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될 어려운 항해를 예고한 것 이였다,
8월27일 오전11시
“C형 발령 났습니다” 하며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웬 일인가하여 눈을 뜨니 조타장을 맡고 있는 J경사의 웃음이 눈앞에 있었다,
“아니 무슨 도깨비 울음소리여”,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 하네, 하면서도 평상시 나에게 흰소리를 할 위인이 아닌지라 조금은 의심이 갔다
“정 못 믿겠으면 함 내 게시판을 보시오, 페스카마호 선장 발령명령서가 있을 테니” 한다,
도대체 무어가 잘못된 건가, 말단 직원에 불과한 나에게 그런 중책을 맡겼다는 사실이 좀 체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후 함장의 호출이 있고 “그래도 입사 전 경력으로 볼 때 C순경이 제일 적임이라 판단하여 발령했다”하며 미안하지만 출동 끝날 때 까지 최선을 다해달라는 당부가 있었다,
28일 오전7시30분
다시 하루를 더 항해한 끝에 페스카마호가 유령처럼 떠있는 일본도리시마 북서쪽63마일 태평양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페스카마호를 억류하고 있는 일본해상보안청 순시함과 상봉하고 선상 집단살인사건이 일어난 페스카마호와 살인범들에 대한 인수인계가 국제법 협약에 의해 페스카마호의 갑판 상에서 양국 함정사이에 이루어졌다
"자! 이제 페스카마호로 파견될 승조원들은 신속하게 고무보트로 이동하라"는 긴장된 함장의 지시를 받자 등골을 타고 야릇한 긴장감이 흘러내렸다
어렵사리 추가 안전요원을 지원받아 건국 이래 최대의 선상살인이 자행된 “페스카마”호에 승선하여 바라본 현장은 눈뜨고 볼 수 없는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제일먼저 눈에 띤 것은 살인범들이 탈출용으로 제작한 듯한 나무보트2척이 우현갑판에 포개져 있었고 갑판에서 조타실(Bridge), 침실에 이르기 까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어 조타설비를 제외한 통신설비와 선장실을 비롯한 간부선원들의 침실은 철저히 파괴되고
탈출 시 가져갈 목적으로 꾸려놓은 짐들로 조타실은 터져나갈 듯하였다
수사요원들의 현장검식에서 하나씩 들어나는 범죄의 행태가 가뜩이나 주눅이 든 파견승조원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일부러 별것 아닌 것처럼 여유를 부려보는 내 자신도 조타실 비닐바닥을 들추자 들어나는 혈흔을 보고 큰 충격에 빠져들었다
그러니까
페스카마15호(온두라스국적 참치연승어선)는 1996년6월7일 부산항을 출항 티니안섬에서 중국조선족선원을 추가로 승선시키고(한국인7명, 조선족7명, 인도네시아인10명 등 총24명) 항해를 시작하며 조업준비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선원생활을 시작하는 조선족선원들과 인도네시아선원들에 대한 한국간부선원들의 질책이 잇따르고 일부구타가 있었으나 의식과 문화적 차이를 이들은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1996년6월27일 원만한 조업이 이루어지지 않자 선장이 조선족선원인 리춘성을 구타하고 이에 격분한 그가 선장에 대들자 선장은 도끼를 가져오게 하는 등 공포분위기가 조성되므로 써 조선족선원들의 집단움직임이 시작되었다
6월28일 조선족선원들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집단으로 작업을 거부하자 6월30일 저녁 선장은 하선희망자를 파악하고 하선경비보증서의 서명을 요구하고
마침내 조선족선원들의 하선조치를 위해 사모아로 회항을 시작한
8월1일 밤8시 조선족선원인 최일규의 침실에서 "선장과 갑판장을 죽이고 배를 침몰시킨 뒤 뗏목을 만들어 일본이나 한국으로 표류하도록 하자"는 모의를 하고
8월2일02시부터 2등항해사 전재천의 주도로 선장을 불러내 살해한 뒤 갑판장등 잠든 한국선원 6명을 "선장이 찾는다,"는 구실로 차례로 불러내어 흉기로 무참히 살해하고 바다에 버렸으며 동참을 거부한 조선족1명과 인도네시아인 3명은 죽일 목적으로 급냉실에 가두고 이를 목격한 편승한국인 실습생 C군마저 06시경 잠에서 깨어 갑판에 나온 인도네시아선원들 3명을 흉기로 위협 산채로 수장시키게 하였으며 5일후 급냉실에 가둔 채 미처 죽지 않은 4명의 선원들을 무차별 폭행한 후 실신상태인 그들을 바다에 던져 수장시키는 등 총11명의 선원을 참혹하게 죽인 건국 이래 최대의 선상살인 사건이었다,
다만 유일한 생존자인 일등항해사(이OO)는 참사를 주도한 2등항해사와 한 침실을 사용하는 등 평상시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초기 살해에서 유보되고 탈출 시까지는 항해를 시킬 목적으로 살려놓았으나 최종단계에서는 생존한 인도네시아선원들과 함께 모두를 살해하고 선박을 침몰시킨다는 계획이었다,
8월6일 생존자 전원을 살해한다는 소문으로 인도네시아인들이 단합하여 흉기를 들고 반란선원들과 대치하자 1등항해사(이OO)의 중재로 양측모두 흉기를 바다에 버린 뒤 화해하고 항해를 재개하였으나 반란선원들은 도피대상 국가를 결정하지 못하여 목적지를 수시로 번복하는 등
항해기간이 길어지고 연료와 식수가 고갈되므로 써 선체가 기울자
8월22일 오전9시 ~ 11시경 일본 도리시마섬 인근해상에서 선체의 평형유지를 위해 어획물 이적을 목적으로 반란선원들을 따라 어창에 들어가려는 인도네시아선원에게 일등항해사 L이 은밀하게 반란선원들이 아래쪽 어창에 들어가는 즉시 위에서 어창뚜껑을 닫으라는 지시에 따라 뒤따라 들어가던 인도네시아선원들이 실행하고 조타실에서 뛰어 내려가는 주범인 2등항해사 전재천도 격투 끝에 결박하는데 성공하여 사실상 전무후무한 선상반란은 자체적으로 진압되고 8월24일 오후6시40분경 일등항해사 L이 이 해역을 순시하던 일본어업지도선에 헤엄쳐가 구조를 요청함으로써 전모가 들어난 것이다
8월28일 오전10시
현장검식을 마치고 수사요원들이 떠난 뒤 예인색을 결합하고 본격적인 항해가 시작되었지만
호송을 위해 파견된 직원과 전경들은 불안감에 1평 남짓한 조타실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으려하였다
얼마 후 인도네시아 선원한사람이 “킵틴 짭짭”하는 만국공통어를 사용
식사준비가 되었다 하여 선원식당에 내려가니 인도네사아선원들이 지켜보고 있어 호기 있게 수저를 들고 국물 한 숟갈을 떠먹다 도로 뱉어내고야 말았다
“무슨 놈의 국이 이래”하며 자초지종을 확인한 결과 선내에 식수가 바닥나서 바닷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인다는 것이다, 선내에는 청수가 마실 물밖에는 없었다,
“걸려도 제대로 걸렸다”는 기관장 P순경의 넋두리에 모두가 할말을 잃었다 어쩌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인데 하는 후회가 스멀스멀 치밀어 올랐다
출동종료 시까지 변변한 먹 거리도 편안한 잠자리도 기대할 수 없는
페스카마호에서 마주친 인도네시아선원들은 오랫동안 죽음의 공포 속에서 이제 살았구나 하는 기쁨과 왠지 모를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 선원 중에는 아무리 살해 위협 속에서 행한 일이지만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어린실습생 C군을 직접 수장시킨 3명의 선원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식사를 포기한 오후 선내 안전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둘러본 어창은 냉동기가 정지되고 온도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어 죽은 자들의 눈물이 배어있을 냉동 참치 30톤이 그대로 녹아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정상상태에서 크게 벗어난 선박에서 아무것도 기대할게 없어 직원과 전경을 불러 모아 놓고 근무 중 주의사항을 하달하였다
첫째 “항해 중 외부갑판 활동을 자제하고 해상 추락에 주의할 것”
둘째 “예인 색 상태를 수시로 파악할 것”
셋째 “생존한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동태를 지켜볼 것”
넷째 “국제신호규칙에 준한 신호 깃발과 등화를 점등할 것”
다섯째 “태평양 함과의 통신(V.H.F)을 유지할 것”
여섯째 “사건현장을 가급적 원형대로 보존 할 것” 등 이었다
그런 후 근무자를 제외한 직원과 전경들은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하지만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하나, 둘 조타실로 모여들었다
“왜들 쉬지 않고 나오느냐” 하자 하나같이 하는 말이 “꼭 현창을 통해 들어 온 귀신이 목을 조를 것만 같아 불안해서 잠들 수가 없다”고 한다,
“무슨 귀신이 있어 경찰관들이 겁들을 집어먹고 그러느냐” 큰 소리를 치는 나 역시 별로 침실에서 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페스카마호에서의 첫째 날은
한 평 남짓한 조타실에서 모두들 쪼그리고 앉아 꼬박 밤을 새우며 지냈다
8월29일
일본근해까지 태평양 함에 의해 예인되어 온 페스카마호는 “붕고수도” 진입을 앞두고 함장에게 “자력항해에 대비하여 아무래도 본선사정에 정통한 1등항해사의 조력이 필요하니 1차 조사가 끝났으면 돌려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하루 만에 돌아온 1등 항해사 L에게 출신학교를 물으니 나와 같은 동문후배가 되어 보다 상세한 정황을 들을 수 있었다
도주하다 흉기에 찔린 조기장K씨가 바다에 빠지지 않으려고 난간을 붙잡고 살려 달라 애원하자 붙잡은 손을 흉기로 내리쳐 수장시키는 등 야수와 같은 행위를 서슴치 않았으며
중국조선족선원들의 하선을 위해 미국령 사모아로 회항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D수산소속 동원212호가 “본선 실습기관사가 급성맹장염에 걸렸으니 후송을 시켜 달라”는 부탁으로 편승한 다음날 새벽 산채로 바다에 수장당한 이야기 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생생한 범행목격담을 듣고서 가뜩이나 고생스런 “페스카마”호의 생활이 몸서리쳐졌다
천인 공로할 범행을 겪은 심경에 대해 일등항해사L은 담담한 목소리로
“처음에는 죽음의 공포로 잠을 자지 못하다 며칠만인가부터 는 죽음조차 초월하여 죽 일려면 죽여라 하는 마음이 들어 그래도 몇 시간씩을 잘 수 있었다” 한다,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시는 배를 타지 못할 것 같다며 오직 배를 타기위해 키워 온 꿈을 버리겠다는 대목에서는 나 역시 눈물이 나왔다
그동안 조종간을 교대할 사람이 없어 지칠 때로 지친 나는 혈흔이 묻어있는 조타실 마루 장 아래에 있는 비밀창고에서 과일 캔을 꺼내주는 1등 항해사와 교대를 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규슈연안에 접어들어 예인등화를 밝히고 붕고수도를 거쳐 세도내해에 접어들자 날이 훤히 밝아왔다
8월30일 아침6시경
함장으로부터 “예인 색을 풀고 자력으로 항해하고 시모노새끼해협은 도선사를 승선시켜 통과하라”는 연락이 왔다
자력항해를 시작한지 얼마 후 상공을 근접 비행하는 취재항공기와 좌우 양현으로 여러 척의 취재 선박들이 앞 다투어 항로를 막았지만 “어떠한 취재에도 응하지 말고 페스카마호에는 절대로 기자들을 승선시키지 말라”는 지시에 따라 취재선박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윽고 도선(導船)대기 장소에 도착 파이로트를 승선시켜 시모노새끼해협을 무사히 통과하고 나서 파이로트가 하선하자마자
“페스카마호는 계속해서 자력으로 부산항까지 항해 할 것”하는 함장의 지시를 남겨두고 태평양함은 범인들을 싣고서 전속력으로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일본연안을 벗어나자마자 앞도 보이지 않는 폭풍우와 거센 파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력항해를 시작한 페스카마호는 장기간 항해로 인하여 연료와 청수가 바닥이 난 공선상태로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만 같이 가랑잎처럼 흔들렸다
앞도 보이지 않고 황천항해를 시작한지 6시간이 지난 오후 3시경 평상시 침착하기만 한 기관장 P순경이 급하게 조타실로 뛰어오며 “선장” “아무래도 기관이 정지될 것 같다” 며 죽는 시늉을 한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심한 선체동요로 연료탱크에 공기가 들어가서 그런지 기관에 연료가 공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명 태평양에서 출발당시 부산항까지 자력항해가 가능한 연료가 있음을 확인하여 보고되었고 일본해상보안청측에서도 확인된 것인데 이제 와서 연료가 없다니 말이 되느냐고 언성을 높이며
심각한 현 사태를 태평양함 함장에게 보고하고 다시금 예인해 줄 것을 요청하니 갑자기 노성이 들렸다
“아니 지금 장난하나, 현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이러나, 실시간으로 중앙부처로 보고되고 있으며 금일 오후 5시까지 부산 감만부두로 범인들의 호송이 끝나야 한다,” 며 당황한 함장의 목소리가 들리고 얼마 후 태평양함의 기관장이 P순경을 찾는 무선이 왔다,
무언가 기술적인 문제를 묻고 난 뒤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태평양함은 상부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냈다
잠시 후 300톤급 중형 구난함이 접근하더니 페스카마호의 톤수를 묻고 도저히 예인이 불가하다며 사라지고 나서
되돌아온 태평양함과 예인색 연결을 시도하였지만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로 예인색 연결이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예인이 재개되었으나 몸은 이미 지칠 데로 지쳐있었다
그렇게 대한해협의 밤은 폭풍우속에서 불면과 탈진으로 깊어가고 있었지만 이를 눈 여겨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96년8월31일 아침5시경
아직도 폭풍우가 계속되고 있는 부산앞바다에 도착
부산항 외항방파제로 접근하며 나는 결정적인 지시를 기관장P순경에게 하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반드시 기관은 운전상태(Eng Stand by 상태)로 할 것
태평양함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예인색을 줄이지 않고 방파제를 그대로 통과하여 항내로 진입하였지만 바람의 영향을 최대한으로 받는 공선상태인 페스카마호는 예인방향에서 풍하(風下)쪽으로 크게 꺾여 정면으로 방파제를 향하고 있었다,
순간 방파제와 정면충돌을 예감한 나는 예인색이 연결된 상태로 반사적으로 우현으로 선수를 돌려 전속으로 방파제로부터의 회피동작을 취한 순간 배는 방파제 끝단을 스치듯이 지나쳐 비로소 항내로 무사히 진입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부산항에 들어선 순간 어둠속에서 밀려오는 것은 탈진상태에 이른 혼미한 의식이었지만 그래도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예인색을 풀고 내항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부산항의 항로유도등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둠속에서 폭우가 거셌다
아무튼 본능적으로 내항에 입항하여 태평양함으로부터 범인들을 옮겨 실은 중형구난함이 전용부두에 접안을 마친 후 100여명의 내외신기자단이 주목하는 부산항 감만부두에 처참한 선상 살육이 자행된 폐스카마15호를 어렵사리 접안시킬 수 있었다,
이때 빗물이 흘러내리는 조타실 창문으로 중형구난함으로부터 수갑과 포승줄에 묶인 희대의 살인범 6명이 나란히 경찰서로 호송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동안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한 직원과 전경들을 인솔하여 죽음의 배 "페스카마15호”를 힘겹게 하선하였다. <大尾>